<수용소가 정해주는 결혼상대>
신씨와 같은 정치범수용소 수감자들의 삶은 인간 이하, 아니 짐승 이하이다. 결혼(結婚)과 같은 人倫의 大事도 『일을 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수용소가 허락하고 지정해 주기 전에는 남자도, 여자도 상대를 모른다. 어느 날 담당 보위지도원(수용소 관리)은 「일을 잘 해 온」 대상 남녀를 불러놓고, 훈시하며 결혼을 알려준다.
『야, 너희 둘 오늘부터 결혼이야. 알갔디? 앞으로 일을 열심히 하라. 일 안 하구 뺀질뺀질 대믄 알디? 다시 갈라 놓캈어!』
<불성실·불복종하면 총살>
신씨가 수감됐던 정치범수용소는 출소가 불가능한 소위 완전통제구역이다. 보위지도원의 통제 아래 죽는 날까지 혹사당한다. 이곳에선 『작업관계 外 3명 이상이 모여 대화할 수 없다.』『보위원 승인 없이 밤에 3명 이상 돌아다니면 총살(銃殺)당한다.』 『보위원에게 불만을 품은 경우·불성실한 경우·불복종한 경우, 시설물을 파괴한 경우, 도둑질한 경우』 모두 총살 대상이다.
<이상하게 피가 나오지 않고 혹이 튀어나왔다>
정치범수용소에선 보위원의 사형(私刑)이 비일비재하다. 죽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신씨는 1989년 6월경 인민학교 2학년 때의 기억을 적고 있다.
소지품검사 증 같은 반 여덟 살 여자아이 주머니에서 밀 이삭 5개가 나왔다. 일상적 굶주림에 창고에서 밀 이삭 몇 개를 집어든 것이다.
『야 새끼야, 너 강냉이 따왔다. 너 새끼 손목아지 잘려 나가라구 길디』보위원 선생의 욕설과 함께 구타가 시작됐다.
『아이를 무릎 꿇어 앉힌 채 지시봉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 아이 머리에서는 피가 나오지 않고 혹이 사방에 튀어나왔다. 그러기를 1시간 30분 정도...그 아이는 끝내 기절했다. 코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그 아이를 부축해서 집까지 데려다 줬는데 그 날 저녁 끝내 죽었다고 한다...그 여자 아이는 참 곱게 생겼었다. 이렇게 어린 여자아이가 매 맞아 죽었어도 그 누구도 책임이 없다. 이것이 바로 보위부 14호 관리소의 현실인 것이다.(본문에서)』
<노인들을 얼리고 데워 죽였다.>
1999년 12월, 개천14호관리소는 영하 15도에서 20도까지 내려갔다. 신씨는 경사지 밭에 지게로 거름을 나르다 쉬던 중 발각된 4명의 노인 이야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보위지도원이 그들을 불러냈다. 신발과 바지를 벗기고 팬티 바람으로 맨 땅에 무릎을 꿇게 했다. 노인들은 오후 2시쯤부터 벌을 받았는데 저녁 7시경에는 휴게실 안으로 불러냈다.
구들바닥에 다시 무릎을 꿇어 앉혔다. 그리고는 사람이 델만큼 뜨겁도록 장작을 계속 넣었다. 그들의 발바닥과 무릎은 얼었다가 데어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우성 소리는 보위지도원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몇 달이 지난 후 그들은 끝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과 남편 앞에서 처형당한 어머니>
정치범수용소 탈출기도자는 공개처형(公開處刑) 대상이다. 신씨의 어머니와 형 역시 도망치다 붙잡혀 공개 처형당했다.『눈물조차 나지 않았던』 가족들의 사형 모습에 대해 신씨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공개처형은 어머니부터 시작됐다. 어머니 팔을 뒤로 묶은 채 나무상자 위에 올라 세웠다. 그리고 이들은 어머니 입만 가리고 눈은 가리지 않았다...교수형장에 매달려 있는 밧줄을 어머니 목에 건 다음, 그 광경은 차마 지켜 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자기 엄마와 형이 교수형과 총살을 당하는데 그것을 지켜 볼 아들과 아버지가 어디 있으랴. 아버지 쪽을 보자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때가 되었는지 어머니가 밟고 있던 상자를 빼내었고, 상자를 빼내자마자 어머니는 대롱대롱 매달리기 시작했다. 밧줄은 점점 어머니의 목을 조여 갔다. 어머니는 마지막 발악으로 몸을 몇 번 요동치고는 잠잠해졌다. 그리고는 형의 차례였다. 『민족반역자 신희근을 향하여 총탄 세 발 쐈!!』
<탄차를 미는 열두 살 어린이들>
정치범수용소에서 사람의 목숨은 벌레와 같다. 어린이들까지 탄광작업, 건설현장에 동원된다. 신씨가 중학교 1학년이던 1993년 6월 중순경 갱지원(탄광작업)을 나갔던 당시의 회상이다.
『열 두 살의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이 쓰는 탄광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불을 들었다. 얼굴은 탄가루로 뒤덮여 눈 흰 자위와 치아만이 하얗고 온통 검댕이었다...탄차를 밀고 한 10리 정도 나왔을 때, 옆에 있던 문성심이 발을 잘못 짚으면서 탄차 바퀴에 발이 찢겼다.
순간 좁은 갱 안에 12세 여자이이의 울음소리가 퍼졌다. 울음소리가 이렇게 소름끼치게 들려보기는 처음이었다...문성심의 신발을 벗겨 보니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이 바퀴에 눌리어 뼈가 부서진 상태였다. 이때 학급장 홍주현이 달려와 신발 끈으로 문성심의 발목을 묶어 피가 나오지 않게 지열하고 문성심을 탄차에 태웠다.』
<열네 살에서 열일곱 시신들, 모두 예쁜 여자 아이들, 남자아이들>
신씨가 고등중학교(고등학교) 시절인 1998년~1999년 개천14호관리소 수감자들은 대동강 내 중형발전소 건설에 동원됐다.
신씨는 당시『하루에 3~4구의 시체가 나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공사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주검들을 수습하는 일을 직접 거들기도 했다』며 이렇게 말한다.
『어린 학생들이 노동재해 사고로 사망한 숫자는 내 눈으로 본 것만 7명이다. 거기에 소문으로 들은 것까지 합하면 수십 명은 될 것이다. 이들의 나이는 모두 14세부터 17세. 모두 예쁜 여자 아이들과 남자 아이들이다.』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다.>
1999년 3월 신씨는 콘크리트 벽 밑에서 일하던 남녀학생 8명이 30미터 높이에서 추락한 사고를 목격한다. 결과는 뻔했다. 수십 톤 콘크리트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됐다. 신씨의 회상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의 시체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보위원들은 하던 일을 계속 하라는 것이었다...건설 현장에서 누가 죽는다 해도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은 없다. 단지 나의 목숨이 붙어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금 자신의 자리에서 일을 할 뿐이다. 발전소 건설 현장은 매일 매일 삶과 죽음을 갈랐다.』
<김정일을 심판대에 세우고 구들을 구출해야>
신씨는 수기「세상 밖으로 나오다」마지막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이제 내가 할 일을 정해야 할 것 같다. 우선 보위부 14호 관리소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고 세계가 나서서 한 나라에서 나서 잘았어도 없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그들을, 북한의 인권을 세계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김정일을 심판대에 세우고 그들을 구출하여야 한다.』
조갑제닷컴 [2007-10-30]
[뉴시스] 2007년 12월 01일(토) 오전 01:53

완전통제구역 출신으로는 최초의 탈북자인 신씨는 3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 저널(WSJ) A섹션 오피니언면에 ‘북한 수용소의 생활’이라는 제하의 기고문에서 수용소에서 태어나 노예처럼 사육되는 어린이들과 여성재소자들에 대한 성학대, 짐승같은 생활을 하는 재소자들의 삶 등 믿기 힘든 인권유린의 참상을 폭로했다.
특히 그는 14세때 수용소를 탈출하려다 잡힌 어머니와 형이 공개처형당하는 모습을 보도록 강요받은 사실을 털어놓아 미국의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지난 2005년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 중국에서 지내다 이듬해 한국에 온 신씨는 지난달 수용소 참상을 다룬 ‘북한정치범 수용소 완전통제구역-세상밖으로 나오다’라는 수기집을 펴낸 바 있다.
다음은 기고문.
나는 82년 11월 19일 ‘죄수’로 태어나 2년전까지 내가 집으로 부르는 정치범수용소 14호에서 살았다.
평양에서 50마일 북쪽으로 떨어진 개천의 이 수용소에는 범죄의 종류에 관계없이 잡아들인 재소자와 수많은 사람들이 범죄자의 가족과 친척이라는 이유로 수용돼 있다.
북한에는 ‘3대 규칙’에 따라 범죄자의 가족은 3대에 걸쳐 반역자로 투옥된다. 나는 곤봉과 주먹을 맞는 노예였고 사랑과 행복 기쁨 저항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곳에서 살았다. 내가 그곳에서 태어난 이유는 한국전쟁때 아버지의 형제 두명이 남한으로 탈출했기때문이었다.
‘반역죄’로 인해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은 체포돼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각각 다른 곳에 수용됐다. 그러나 어머니는 왜 수용소에 투옥됐는지 아직 모른다.
그곳에서 부모님은 결혼을 허가받았다.(드물게 재소자들은 아주 열심히 일하거나 보위부 요원들의 환심을 사면 결혼을 허가받는다.) 이것이 나와 형이 수용소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다.
우리는 ‘허가’받은 가족이었지만 서로 애정을 갖지도 못했고 가능하지도 않았다. 내가 열네살때 어머니와 형이 탈출을 기도한 죄로 체포됐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투옥됐다. 그곳에서 7개월동안 보위부요원들은 우리 가족이 탈출을 공모했다는 것을 털어놓도록 강요했고 심하게 고문당했다. 당시 고문으로 등에는 흉터가 생겼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96년 11월 29일 어머니와 형은 반역죄로 공개처형됐다. 나는 현장에 끌려나와 그들의 죽음을 보도록 강요받았다.
개천으로 돌아와 교도소에서 중학교 과정을 끝낸 나는 의류를 만드는 교도소내 공장에 배치됐다. 그곳에서 교도소 밖에서 살다 잡혀온 재소자를 만났고 바깥세상 얘기를 들었다.
2005년 1월 2일 우리는 탈출을 감행했다. 나는 성공했지만 동료는 철책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죽은 것 같았다.
중국을 거쳐 서울에 온후 실망과 슬픔도 있었지만 기쁨과 행복,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북한에 있을 때 나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유일한 감정이 있었다면 오직 공포였다. 매맞는 공포, 굶주림의 공포, 고문의 공포, 죽음의 공포였다.
개천수용소의 참상을 알리려고 탈출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는 수만명이 고통받고 있다. 한끼라도 더 먹기위해 아귀다툼을 하고 풀과 나무뿌리, 진흙, 쥐와 곤충으로 연명한다. 무자비한 고문은 공개리에 자행되고 매질은 계속된다. 여성은 종종 낙태가 강요되며 어린이에게 어린시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범들에게 인간의 권위는 없으며 지능과 감정, 꿈이 있을 수 없는 짐승으로 취급받는다. 사람을 이런 식으로 다뤄서는 안된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학대행위에 우리는 맞서야 한다. 재소자들이 더이상 침묵속에 죽어가서는 안된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폭력에 항의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대변해야 한다.
노창현특파원 robin@newsis.com
Life in North Korea's Gulag
November 30, 2007; Page A16
Seoul, Korea
I was born a prisoner on Nov. 19, 1982, and until two years ago, North Korea's Political Prison Camp No. 14 was the only place I had ever called home.
The camp, established in 1965, is located in Kaechon, about 50 miles north of Pyongyang. When it first opened, the government rushed to fill it with prisoners. Many were charged and detained regardless of when or what kind of "crime" was committed.
Countless others were imprisoned simply because they were relatives of those charged. Under North Korea's "Three Generation Rule," up to three generations of the criminal's family must be imprisoned as traitors.
I was a slave under club and fist. It was a world where love, happiness, joy or resistance found no meaning. This was the situation I found myself in until I escaped to China, and then South Korea. There, I was told why I was imprisoned by my distant relatives, who had escaped to the South during the Korean War.
In the midst of that conflict, two of my father's brothers fled to freedom. Because of this "traitorous" crime, my grandparents, father and uncle back in the North were found guilty of treason and crimes against the state, and were arrested. My father and uncle were separated from each other and my grandparents, and were stripped of all identification and property.
I am still not sure why my mother was incarcerated. While serving their sentences in Kaechon, my parents were allowed to marry. (Sometimes, inmates are given permission to marry if they work very hard and find favor in the eyes of the State Security agents). This was how both my brother and I were born as political prisoners.
Although we were a family by fiat, there was nothing familial about us. We showed no affection for one another, nor was that even possible.
When I was 14 years old, my mother and brother were arrested while trying to escape. Although I had no idea they were planning to run away, I was detained in another part of prison. The State Security agents there demanded that I reveal what my family was conspiring to do. I was tortured severely for seven months. To this day, I still carry the scars on my back and shudder at the memory of that time.
On Nov. 29, 1996, my mother and brother were found guilty of treason and sentenced to public execution. I was taken outside and forced to witness their deaths.
Upon returning back to Kaechon, I finished what passes for a middle school in the prison and began working in one of many factories on the prison grounds making garments. It was here that I met another inmate who had once lived outside of the prison camp. He told me stories of the outside world, and I increasingly longed to become part of it. We plotted our escape and on Jan. 2, 2005, we attempted to run away. I was successful, but he fell on the prison's barbed wire. I glanced back once; he appeared to be dead.
As I sit here writing this op-ed comfortably in Seoul, I can't help but wonder at the vastly different lives South Koreans and inmates of Political Prison Camp No. 14 live. In South Korea, although there is disappointment and sadness, there is also so much joy, happiness and comfort. In Kaechon, I did not even know such emotions existed. The only emotion I ever knew was fear: fear of beatings, fear of starvation, fear of torture and fear of death.
Even though I did not escape Kaechon expressly to inform the world about such conditions, I feel that I cannot keep silent. Today, tens of thousands are suffering silently in government-sponsored political prison camps in North Korea. Inmates are given only enough food to be kept on the verge of starvation, and they often fight with one another in hopes of getting one more meal. Many people have resorted to eating grass, tree bark, clay, rodents and insects. Torture is open and rampant, and beatings occur every hour of every day. Women often undergo forced abortions and children have no childhood.
These political prisoners live with no dignity as human beings. They are treated, and taught, that they are merely beasts without intelligence, emotions or dreams. If a prisoner attempts to escape, he is severely punished and will most likely be publicly executed.
Humans should never be treated this way. It is time for us to stand up for those being persecuted in North Korean gulags. They do not deserve to die in silence. We must protest these violent acts against humanity. We must become their voice.
Mr. Shin was born and lived in a North Korean gulag until 2005. He is the author of the Korean language book "I Was a Political Prisoner at Birth in North Korea" (DataBase Center for North Korean Human Rights, 2007).
http://online.wsj.com/article/SB119637269611208428.html?mod=googlenews_w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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